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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약 연애 매뉴얼 · snow

6화. 할머니

2026. 7. 16. ·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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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 행사가 있고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도현에게서 뜻밖의 연락이 왔다. "할머니께서 소은 씨를 한번 뵙고 싶어 하십니다." "할머니요? 벌써요?" 소은은 순간 긴장했다. 자선 행사 정도야 낯선 사람들 사이에 섞여 넘어갈 수 있었지만, 가족 상견례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저희 할머니는 좀 예민한 분이세요. 특히 이 결혼 문제에 관해서는 더 그러시고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절대 만만하게 보실 분이 아닙니다." 도현의 목소리에서도 미묘한 긴장이 느껴졌다. 소은은 마른침을 삼켰다. "제가 뭘 준비해야 할까요?" "평소처럼 하시면 됩니다. 오히려 너무 꾸민 모습보다는, 소은 씨 본연의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나을 겁니다. 할머니는 그런 걸 금방 알아채시거든요." 주말, 소은은 도현의 안내에 따라 한적한 교외의 한옥으로 향했다. 고풍스러운 대문을 지나 정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소은의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긴장하지 마세요. 제가 옆에 있을 테니까." 도현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말이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응접실에 들어서자, 단정한 한복을 입은 노부인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꼿꼿한 자세에서 오랜 세월 쌓아온 위엄이 느껴졌다. 소은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소은이라고 합니다." "앉아라." 짧은 한마디였다. 소은은 도현과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할머니는 한참 동안 말없이 소은을 살폈다. 그 시선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소은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카페를 한다고 들었다." "네, 작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장사는 잘되고?" "요즘은 좀 어렵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소은의 대답을 가만히 듣더니, 옆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솔직하구나. 도현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좋은 말만 하던데." 소은은 순간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도현을 흘끗 바라보았다. 도현은 옆에서 무표정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짓말은 못 하는 성격이라서요. 힘든 건 힘들다고 말씀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흠." 할머니는 짧게 콧소리를 내며 다시 소은을 응시했다. "도현이가 너를 어떻게 만났다고 하더냐." "제 카페에 오셨다가, 실수로 커피를 쏟으셨어요." 솔직한 대답에 할머니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도현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날 서로 인상 깊게 남아서, 그렇게 인연이 됐습니다." "인상 깊었다니, 커피를 쏟은 게 인상 깊었다는 거냐, 아니면 이 아이가 인상 깊었다는 거냐." 할머니의 날카로운 지적에 도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소은은 그 모습이 신기했다. 언제나 여유롭던 도현이 할머니 앞에서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둘 다입니다, 할머니." 도현의 대답에 할머니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소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가 편찮으시다고 들었다." 소은은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벌써 그런 것까지 조사한 모양이었다. "네, 지금 병원에 계세요." "힘들겠구나. 그런 와중에도 카페 하나 붙잡고 버티고 있다니, 보통 성격은 아니겠어." 의외로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움 대신 옅은 온기가 섞여 있었다. 소은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아버지가 저 때문에 힘내시는 걸 보면 그럴 수가 없더라고요." 할머니는 한참 동안 소은을 바라보다가, 문득 옆에 앉은 도현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도현아." "네, 할머니." "이 아이, 마음에 든다." 예상치 못한 말에 도현과 소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요즘 젊은 애들, 다들 번지르르한 말만 늘어놓기 바쁘던데. 이 아이는 다르구나. 솔직하고, 제 앞가림도 야무지게 하는 성격 같아." "감사합니다, 할머니." 도현이 안도한 듯 짧게 답했다. 소은도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이 모든 게 거짓 위에 세워진 인연이라는 걸,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오직 자신과 도현만이 알고 있었다. "다음에 또 놀러 오너라. 밥이라도 한 끼 같이 먹자꾸나." "네, 할머니. 꼭 다시 찾아뵐게요." 응접실을 나서며, 소은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첫 관문은 무사히 넘겼지만,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잘 넘기셨어요." 정원을 함께 걸으며 도현이 말했다. "할머니가 저렇게 쉽게 마음을 여실 줄은 몰랐어요." "저도 놀랐습니다. 할머니는 원래 사람 잘 안 믿으시는 분인데."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정원을 걸었다. 가을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었다. 소은은 문득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렇게 좋아해 주시는데, 나중에 다 거짓이었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실망하실까요." 도현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합시다. 지금 당장은 계약대로 잘해나가는 게 우선이니까요." 소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불편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할머니의 따뜻한 눈빛, 진심 어린 칭찬. 그 모든 것이 결국 거짓 위에 쌓인 모래성이라는 걸 알면서도, 소은은 그 순간만큼은 진짜 인정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게 사실이었다. 차에 올라타는 동안, 소은은 슬쩍 도현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할머니 앞에서 보였던 조금은 긴장한 모습, 그리고 지금의 복잡한 표정까지. 이 사람도 계약이라는 틀 안에서 나름의 부담을 짊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소은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도현은 평소와 달리 말이 없었다. 창밖을 응시하는 옆얼굴에서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기색이 느껴졌다. 소은은 조심스럽게 침묵을 깼다. "할머니, 원래 저렇게 사람을 빨리 판단하시는 편이세요?" "아니요,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저희 집안에 인사시켰던 사람들 중에, 할머니가 저렇게 첫 만남에 마음을 여신 건 처음이에요." "그럼…… 저 때문에 뭔가 불편하신 건 아니시죠?" 도현은 그제야 소은을 돌아보았다. "아니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할머니가 마음에 들어 하셔야 이 계약이 더 순조롭게 흘러갈 테니까요." 담담한 대답이었지만, 소은은 그 말투에서 미묘한 무게감을 느꼈다. 이 사람에게도 계약이 단순한 사업 이상의 무언가로 다가오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착각하지 말자고 스스로 몇 번이나 되뇌었던 다짐이었다. "할머니가 아까 그러셨잖아요. 도현 씨한테 좋은 말만 하는 사람들만 있었다고. 대표님 주변엔 다들 그런 사람들뿐이었어요?" 도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낮게 대답했다. "제 위치가 그렇습니다. 다들 제 눈치를 보거나, 원하는 걸 얻어내려고 접근하죠. 그래서 오히려 소은 씨처럼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낯설고, 동시에 편했던 것 같습니다." 뜻밖의 고백에 소은은 잠시 말을 잃었다. 차창 밖으로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이상하게 편안하게 느껴지는 게, 소은은 스스로도 낯설었다. 집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며, 소은은 도현에게 짧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고마웠어요. 할머니 뵙는 거, 혼자였으면 훨씬 더 떨렸을 텐데." "저야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음에 또 연락드리죠." 차가 멀어지는 걸 지켜보며, 소은은 오늘 하루를 곱씹었다. 할머니의 따뜻한 눈빛도, 도현의 뜻밖의 고백도, 모두 마음 한구석에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절대 진심이 되지 말라던 그 조항이, 이제는 조금씩 위태로워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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