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첫 공식 데이트
2026. 7. 16. · 👁 3
토요일 아침, 초인종이 울렸다. 소은이 문을 열자 스타일리스트 두 명과 커다란 캐리어 가방을 든 사람들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도현 대표님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오늘 준비 도와드릴게요." 정신없이 흘러가는 몇 시간이었다. 헤어와 메이크업이 끝나갈 즈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짙은 눈매, 자연스럽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 마지막으로 걸친 짙은 남색 드레스는 몸에 꼭 맞았다. "정말 잘 어울리세요. 대표님 안목이 대단하시네요." 스타일리스트의 말에 소은은 어색하게 웃었다. 도현이 직접 드레스를 골랐다는 사실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오후 여섯 시 정각, 초인종이 다시 울렸다. 문을 연 소은의 눈앞에 검은 슈트를 완벽하게 차려입은 도현이 서 있었다. 그는 잠시 소은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낮게 헛기침을 했다. "……잘 어울리네요." 짧은 한마디였지만, 소은은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가시죠, 시간 늦겠습니다." 도현은 이내 평소의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가 소은을 에스코트했다. 검은 세단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소은은 창밖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오늘 행사에서는 자연스럽게 행동하시면 됩니다. 제 옆에서 웃고, 가끔 팔짱 끼는 정도면 충분해요. 어려운 질문이 들어오면 제가 대신 답하겠습니다." "질문이라뇨?" "기자들이 있을 겁니다. 어디서 만났는지, 얼마나 됐는지 정도는 물어볼 텐데, 미리 맞춰둔 답변이 있으니 걱정 마세요." 도현은 태블릿을 꺼내 예상 질문과 답변을 정리한 자료를 보여주었다. 카페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고, 사귄 지 세 달 정도 됐다는 설정이었다. 소은은 그 내용을 눈으로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이라도 해야 하나요?" "필요하면 지금 해보시죠. 어디서 처음 만났습니까?" 도현이 갑자기 기자 흉내를 내며 물었다. 소은은 순간 웃음이 터졌다. "카페에서요. 제 커피를 쏟으셨죠." "그건 사실 그대로 말하면 안 되는데요." "아, 맞다. 제가 대표님한테 반해서 일부러 커피를 쏟았다고 해야 하나요?" 소은의 농담에 도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처음 보는 편안한 미소였다. "그런 설정도 나쁘지 않네요." 행사장에 도착하자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화려한 조명 아래,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도현은 소은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으며 안으로 이끌었다. 그 손의 온기에 소은은 순간 흠칫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이도현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여기저기서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속에서, 도현은 능숙하게 소은을 소개했다. "제 여자친구, 한소은입니다." '여자친구'라는 말이 낯설게 귓가에 맴돌았다. 소은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몇몇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소은을 살폈고, 몇몇은 노골적으로 그녀의 옷차림과 신분을 가늠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어머, 도현이가 여자친구가 있었어? 처음 듣는 얘긴데." 한 중년 여성이 다가와 물었다. 도현의 어머니 지인인 듯했다. 소은은 순간 긴장했지만, 도현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받았다. "조용히 만나고 있었어요. 소은 씨가 워낙 바빠서 저희도 자주 못 만났거든요." "그래? 어떤 일 하시길래?" "작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어요. 손수 만든 디저트도 팔고 있고요." 소은이 대답하자 여자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어머, 소박하고 좋네요. 도현이한테는 딱 어울리는 사람인 것 같아." 예상 밖의 호의적인 반응에 소은은 조금 놀랐다. 대화가 끝나고 자리를 옮기며, 도현이 낮게 속삭였다. "잘하고 계십니다." "긴장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안 그래 보였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웠어요." 행사가 무르익을 즈음, 사진 기자들이 두 사람 주위로 몰려들었다. 플래시가 연신 터졌다. 소은은 도현의 팔짱을 낀 채 카메라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두 분, 언제부터 만나신 거예요?" "어디서 처음 만나셨나요?"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도현은 준비된 답변대로 매끄럽게 응대했고, 소은도 옆에서 짧게 맞장구를 쳤다. 낯선 상황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도현이 옆에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이상한 안정감을 주었다. 행사가 끝나갈 무렵, 두 사람은 잠시 테라스로 나와 숨을 돌렸다. 밤바람이 시원하게 얼굴을 스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잘하시던데요." "저도 놀랐어요.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 얼어붙을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야경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불빛이 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소은은 문득 옆에 선 도현을 바라보았다. 낮에 봤던 냉정하고 사무적인 모습과는 다른, 조금은 편안해 보이는 옆얼굴이었다. "대표님도 이런 자리 피곤하시죠?" "솔직히, 오늘은 좀 편했습니다. 옆에서 계속 긴장하시는 게 보여서, 저도 덩달아 신경 쓰긴 했지만요." 뜻밖의 말에 소은은 살짝 웃음이 나왔다. "걱정해주신 거예요?" "계약 상대가 곤란해지면 저도 곤란해지니까요." 도현은 짧게 대답하며 시선을 돌렸다. 소은은 그 대답이 어쩐지 조금은 진심처럼 들린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착각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던 다짐이 떠올랐다. "슬슬 들어가시죠. 아직 인사드릴 분들이 좀 남았습니다." 도현이 손을 내밀었다. 소은은 잠시 그 손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을 얹었다. 계약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손을 잡는 순간만큼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두 사람이 다시 홀 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한 조명 아래 수많은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재벌가 후계자와 그의 여자친구. 세상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비치는 첫날 밤이었다. 행사가 완전히 끝난 건 밤 열 시가 넘어서였다. 도현은 소은을 다시 차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이따금 오늘 있었던 일들을 짧게 되짚었다. "아까 그분, 화장품 회사 대표님이라고 하셨죠? 대표님한테 되게 친근하게 대하시던데."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분이라서요. 저희 어머니랑 친분이 깊으세요." "그럼 저에 대해서도 어머님께 전해지겠네요?" "아마 그럴 겁니다. 소문이 빠른 분이라." 소은은 창밖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부터 이 거짓말이 얼마나 넓게 퍼져나갈지 실감이 났다. "긴장 많이 하셨을 텐데, 오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도현의 말에 소은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대표님도요. 옆에서 계속 챙겨주셔서 그나마 덜 힘들었어요." 차가 소은의 집 앞에 멈춰 섰다. 도현은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소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차에서 내렸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드레스도, 이것저것 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들어가서 쉬세요." 도현은 짧게 인사를 건네고 차에 올라탔다.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며 소은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오늘 하루가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화려한 조명, 낯선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도현의 손을 잡았을 때의 그 이상한 안정감까지. 집에 들어온 소은은 드레스를 벗어 조심스럽게 옷걸이에 걸어두고, 화장을 지우며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짙은 눈매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다. 오늘 하루 동안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침대에 누운 소은은 휴대폰을 들어 오늘 찍힌 기사들을 검색해보았다. 벌써 몇몇 매체에 두 사람의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재계 후계자 이도현, 열애설 아닌 공식 커플 인정'이라는 제목 아래, 다정하게 팔짱을 낀 두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사진 속 자신의 표정이 낯설었다. 긴장한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도현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소은은 그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저게 정말 연기였을까.' 애써 그 생각을 떨쳐내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절대 진심이 되지 말 것. 계약서의 그 조항이 다시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오늘 하루 동안 느꼈던 그 낯선 안정감이, 소은의 마음 한구석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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