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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약 연애 매뉴얼 · snow

4화. 서명

2026. 7. 15. ·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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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안내 데스크의 직원이 소은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곳은 회장실이 아닌, 조용한 회의실이었다. 도현은 이미 자리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앉으시죠.” 소은은 맞은편에 앉아 도현이 건네는 계약서를 받아 들었다. 어제 라운지에서 본 것과 동일한 내용이었지만, 이번에는 법무팀 검토를 거쳤는지 조항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천천히 읽어보시고, 이해 안 되는 부분 있으면 물어보세요.” 소은은 한 장씩 넘기며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계약 기간은 6개월, 매달 지원금과 별도로 아버지의 수술비 및 치료비 전액 지원, 카페 임대차 계약 5년 연장 및 임대료 동결. 예상보다 훨씬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이 정도까지 해주시는 거예요? 저는 그냥 몇 번 행사에 동행하는 건데…….” “당신 입장에서는 감수해야 할 위험이 적지 않습니다. 언론에 노출되고, 사생활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그만큼의 보상은 당연한 겁니다.” 소은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익숙한 조항 앞에서 멈췄다. 제 7조. 계약 기간 중 어느 한쪽도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애정을 느껴서는 안 되며, 이를 어길 시 계약은 즉시 무효로 한다. “이 조항, 진짜로 지켜질 수 있는 건가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계약서 한 줄로 통제가 되나요?” 도현은 잠시 소은을 바라보았다. “통제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의 자기 절제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저희 둘 다 이건 어디까지나 비즈니스라는 걸 잊지 않으면 되는 거죠.” “비즈니스라……” 소은은 씁쓸하게 웃으며 펜을 집어 들었다. 서명란 위에서 펜 끝이 잠시 머뭇거렸다. 이 서명 하나로 그녀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얼굴, 텅 빈 카페, 밀린 고지서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사각-. 펜 끝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며 이름 석 자를 새겼다. 한소은. 도현도 맞은편에서 서명을 마쳤다.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계약서를 보며, 소은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인생 계약서에 대신 서명한 것 같은 비현실감이었다. “이걸로 계약은 성립됐습니다. 오늘부로 저희는 공식 커플입니다.” 도현이 사무적으로 말하며 계약서 한 부를 소은에게 건넸다. 소은은 그것을 받아 들며 어색하게 웃었다. “뭔가, 실감이 안 나네요.” “실감은 곧 나게 될 겁니다. 이번 주말 행사부터.”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태블릿을 확인했다. “토요일 오전 열 시, 스타일리스트가 자택으로 방문할 예정입니다. 헤어와 메이크업까지 준비해드릴 거고, 오후 여섯 시에 제가 직접 모시러 가겠습니다.” “직접요? 그냥 행사장에서 만나면 안 되나요?” “커플이 각자 따로 도착하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소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서를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도현이 명함 한 장을 추가로 건넸다. 개인 번호가 적힌 명함이었다. “이 번호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급한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우리는 이제 연인 사이니까, 어색하지 않게 자연스러운 연락도 필요할 겁니다.” ‘연인 사이’라는 말이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소은은 명함을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회의실을 나서는 소은의 발걸음이 무거우면서도 이상하게 가벼웠다. 아버지의 병원비 걱정, 카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단번에 해소됐다는 안도감과, 낯선 세계에 발을 들였다는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소은은 계약서를 서랍 깊숙이 넣어두고, 옷장을 열어 자신의 옷들을 훑어보았다. 평소 입던 편한 티셔츠와 청바지들 사이에서, 이번 주말 입게 될 화려한 드레스는 완전히 이질적으로 느껴질 것 같았다. ‘내가 정말 재벌가 행사에 참석하게 되다니.’ 소은은 침대에 걸터앉아 도현이 준 명함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도현. 세 글자 이름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냉정하고 계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계약서 조항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자신의 입장을 배려하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착각하지 말자. 이건 계약일 뿐이야.’ 소은은 스스로에게 되뇌듯 중얼거렸다. 7조의 문구가 다시 머릿속을 스쳤다. 절대 진심이 되지 말 것. 그 한 줄이 앞으로 6개월간 그녀가 지켜야 할 유일한 규칙이었다.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도현에게서 온 문자였다. [토요일 잘 부탁드립니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옆에 있을 테니까요.] 의외로 다정한 문구에 소은은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사무적인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가끔씩 이런 예상치 못한 배려를 보이는 게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소은은 짧게 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창밖으로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이제 며칠 후면, 그녀는 낯선 세계의 문턱을 넘어 완전히 다른 삶을 마주하게 될 터였다. 다음 날, 소은은 병원에 들러 아버지를 뵈었다. 침대에 누운 아버지는 예전보다 훨씬 야윈 얼굴로 딸을 반겼다. “우리 딸, 요즘 얼굴이 좋아 보이네. 카페는 잘되고?” “응, 아빠. 걱정 마. 다 잘 풀리고 있어.”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완전한 진실도 아니었다. 소은은 아버지의 손을 꼭 잡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계약연애라는 말을 꺼낼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병원비 걱정만큼은 덜어드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수술 날짜가 다음 주로 잡혔다더라. 비용이 꽤 나온다던데, 걱정하지 마. 다 알아서 처리해뒀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그 큰돈이 어디서 나서……” “내가 요즘 일이 잘 풀려서 그래. 아빠는 그냥 몸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아버지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딸을 바라보았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병실을 나서는 소은의 마음이 복잡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과, 동시에 이 계약 덕분에 아버지를 지킬 수 있게 됐다는 안도감이 뒤섞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은은 오랜만에 친구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계약 사실은 말할 수 없었지만,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털어놓고 싶었다. “나 이번 주말에 좀 큰 행사에 가게 됐어.” “행사? 무슨 행사?” “그냥…… 아는 사람 소개로. 좀 격식 있는 자리라 옷도 새로 맞춰야 하고, 되게 떨려.” “뭐야, 갑자기 소개팅이라도 하는 거야? 잘 좀 챙겨 입고 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친구의 아무렇지 않은 반응에 소은은 씁쓸하게 웃었다. 진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게 이렇게 답답할 줄은 몰랐다. 전화를 끊고 나서, 소은은 옷장 앞에 다시 섰다. 토요일까지 남은 시간이 자꾸만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소은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계약서에 서명하던 순간의 감촉, 도현의 낮은 목소리, 그리고 문자 메시지의 다정한 문구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절대 진심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조항을 되뇌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미 작은 균열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소은은 아직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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