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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약 연애 매뉴얼 · snow

7화. 같은 상처

2026. 7. 16. ·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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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를 뵙고 온 지 며칠이 지난 어느 저녁, 소은은 카페 마감을 하다가 문득 옛 생각에 잠겼다. 도현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3년 전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아버지가 처음 쓰러지셨던 그 겨울, 소은은 병원비를 마련하느라 매일같이 발을 동동 굴렀다.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는 겉으로는 걱정하는 척했지만, 정작 힘든 시기마다 슬며시 자리를 피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그 시기에 다른 여자를 만나며 소은의 사정을 이용해 자신은 힘든 일 없이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 헤어지자는 말조차 문자 한 통으로 끝냈던 그 사람을, 소은은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카페 문을 잠그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십니까? 근처에 왔는데, 얼굴 좀 보고 싶어서요." '얼굴 좀 보고 싶다'는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계약 관계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다. 소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어디로 갈까요?" 두 사람은 근처 작은 술집에서 만났다. 조용한 분위기의 가게, 은은한 조명 아래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소은의 말수가 평소보다 많아졌다. "저 사실, 예전에 진짜 연애했던 적 있어요. 대학교 때 만난 사람이었는데." 도현은 별다른 말 없이 소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3년 정도 만났어요. 처음엔 정말 좋았어요.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 저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더라고요. 심지어 저희 집안 사정 아니까 은근히 돈 문제로도 이용하려고 했고." 소은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제가 아버지 병원비 때문에 힘들어할 때, 위로해주는 척하면서 뒤로는 다른 여자한테 명품 가방 사주고 있었더라고요.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됐을 때, 정말……." 말을 잇지 못하고 소은은 술잔을 들이켰다. 도현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뒤로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는 게 무서워졌어요. 좋아하는 마음을 주는 순간, 언젠가는 배신당할 것 같은 두려움이 자꾸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이 계약이 오히려 편했던 거군요." 도현의 말에 소은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처음부터 선이 그어져 있으니까, 상처받을 일도 없잖아요. 계약이 끝나면 깔끔하게 헤어지면 되는 거고. 오히려 마음 편했어요." "의외네요. 그런 이유로 이 계약을 받아들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돈 때문이라고 생각하셨어요?" "그것도 물론 있었겠지만, 이런 이유도 있을 줄은 몰랐다는 뜻입니다." 소은은 잔에 남은 술을 마저 비우며 도현을 바라보았다. "대표님은요? 왜 그렇게 진심이 되지 말라는 조항을 만드신 거예요? 누구한테 상처받으신 적 있어요?" 도현은 잠시 침묵했다. 평소라면 웃어넘길 법한 질문이었지만, 오늘은 어딘가 진지한 표정이었다. "저도 비슷합니다.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저희 집안 재산 때문에 접근한 거였어요. 진심이라고 믿었던 감정이 전부 계산된 거였다는 걸 알았을 때, 꽤 오랫동안 사람을 믿지 못했습니다." 뜻밖의 고백에 소은은 잠시 말을 잃었다. 냉정하고 계산적으로만 보였던 도현에게도, 이런 상처가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계약서에 그 조항을 넣으신 거예요?" "어느 정도는요. 처음부터 선을 그어두면, 적어도 서로 실망할 일은 없을 테니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술집 안의 은은한 조명 아래,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묘하게 편안했다. 같은 상처를 안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낯선 위안을 느끼고 있는 순간이었다. "근데 이상하네요." 소은이 문득 입을 열었다. "뭐가요?" "이렇게 서로 상처 얘기까지 털어놓는 거, 이것도 계약에 포함되는 건가요?" 도현은 옅게 웃었다. "글쎄요, 이 부분은 계약서에 없던 조항이네요." 두 사람은 동시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으로 서로에게 무장을 조금 내려놓은 순간이었다. 소은은 이 대화가 계약의 일부가 아니라, 진짜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대표님한테 이런 얘기 할 줄은 몰랐어요. 처음 만났을 때는 그냥 재수 없는 부잣집 아들인 줄만 알았거든요." "저도 소은 씨가 이렇게 속 깊은 얘기까지 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계약 상대로서는 예상 밖의 전개네요." "그러게요, 예상 밖이네요." 소은은 옅게 웃으며 도현을 바라보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 나눈 대화 때문인지, 마음이 평소보다 훨씬 가벼웠다. 술집을 나서며, 도현이 소은을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밤거리를 걷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함 대신 묘한 편안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 얘기해주셔서 고마워요. 힘든 얘기였을 텐데." 도현의 말에 소은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후련해요. 이런 얘기, 누구한테도 제대로 해본 적 없었거든요." 집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잠시 마주 섰다. 가로등 불빛 아래, 도현의 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워 보였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오늘 감사했어요." 소은은 집으로 들어서며, 오늘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계약서의 7조가 다시 머릿속을 스쳤다. 절대 진심이 되지 말 것. 하지만 오늘처럼 서로의 상처를 나누는 순간에도, 그 선이 지켜질 수 있을지 소은은 문득 자신이 없어졌다. 침대에 누운 소은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오늘 도현이 보여준 낯선 얼굴,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술술 털어놓은 옛 상처까지. 계약이라는 틀 안에서 시작된 관계가, 조금씩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소은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소은은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 아래, 어젯밤 나눈 대화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카페 문을 열고 손님들을 맞이하는 내내, 소은은 몇 번이나 도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냉정한 사업가의 모습 뒤에 숨겨진, 상처 입은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점심 무렵, 도현에게서 짧은 문자가 도착했다. [어젯밤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편하게 얘기한 것 같네요.] 소은은 그 문자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사무적인 문체 속에 섞인 옅은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답장을 보냈다. [저도요. 덕분에 마음이 좀 가벼워졌어요.] 답장을 보낸 뒤, 소은은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되뇌었다. 이건 계약이다. 진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자꾸만 피어오르는 이 낯선 감정을, 그녀는 더 이상 완전히 외면할 수만은 없다는 걸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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