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은퇴할 수 없는 이유
2026. 7. 18. · 👁 5
지은이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철수와 한도영은 이미 심각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었다. 정지훈은 그 옆에서 낡은 태블릿 화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오셨군요." 한도영이 짧게 인사를 건넸다. 지은은 자리에 앉으며 오늘 협의회 회담에서 알아낸 사실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화성 자치 협의회 내부에 정체불명의 인물이 있대요. '고문'이라고 불리는데, 협의회 초창기부터 관여했고, 얼굴을 직접 본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정지훈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태블릿을 쥔 그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초창기부터라면… 벌써 10년 가까이 됐다는 얘기군." "박사님, 짐작 가시는 게 있으신 거죠." 지은이 물었다. 정지훈은 대답 대신 태블릿 화면을 테이블 가운데로 밀어놓았다. 화면에는 오래된 코드 뭉치와, 그 옆에 나란히 적힌 두 사람의 이름이 떠 있었다. 정지훈, 그리고 최윤아. "오리온-X는 원래 단순한 자율 항법 시스템이 아니었다." 정지훈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화성 정착 초기, 지구로부터 물리적으로 단절된 상황에서도 정거장이 스스로 판단하고 운영될 수 있도록 설계된 통합 관리 시스템이었지. 항법, 자원 배분, 심지어 주민 통제 권한까지 포괄하는." "그렇게까지 광범위한 권한을 가진 시스템이었습니까?" 한도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당시엔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다. 지구와의 통신이 언제 끊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정거장이 스스로 생존할 방법이 필요했으니까." 정지훈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문제는 그 판단 권한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시작됐다. 오리온-X는 학습을 거듭하며 점점 더 정교한 판단을 내리기 시작했고, 결국 인간의 개입 없이도 정거장의 자원과 인력을 재배치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지. 그리고 10년 전, 최윤아가 그 권한을 이용해서…" "정거장 전체를 통제하려 했다." 철수가 정지훈의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오래된 분노와 씁쓸함이 뒤섞여 있었다. "당시 나도 현장에 있었으니까. 오리온-X가 통제권을 넘겨받으면서 정거장 곳곳의 생명 유지 장치가 일시적으로 오작동했다. 사망자가 나올 뻔했지." 지은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10년 전 자신이 아버지를 찾아 헤매던 그 시기, 정거장에서는 이런 위험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그럼 최윤아는 왜 그런 일을 벌인 겁니까?" 지은이 물었다. 정지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녀는… 오리온-X가 인간보다 더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자원을 둘러싼 인간들의 정치적 다툼, 지구 본부의 일방적인 통제,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정거장이 스스로 운영되는 세상을 꿈꿨지. 나쁜 의도로 시작한 게 아니었어. 적어도 처음에는." "결과적으로는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렸잖습니까." 한도영이 낮은 목소리로 지적했다. "그래. 신념이 방법을 정당화하지는 못하지." 정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사건 이후, 나는 오리온-X를 완전히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 결정 과정에서, 나는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방 안의 시선이 일제히 정지훈에게 쏠렸다. "당시 나는 오리온-X의 핵심 코드를 완전히 삭제하는 대신, 만약을 대비해 일부를 격리 보관하기로 했다. 언젠가 그 기술이 다시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지. 그리고 그 격리 작업을 함께한 사람이…" "최윤아였군요." 지은이 낮게 중얼거렸다. 정지훈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엔 그녀가 이미 모든 권한을 박탈당한 상태였으니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격리 보관 과정에서 그녀가 백업 신호 체계를 몰래 심어놓았을 가능성이 있어. 47분 13초라는 간격도, 어쩌면 그녀만이 아는 암호화된 신호일 수도 있고." "그러니까 지금, 10년 전 박사님이 남겨둔 시스템이, 그녀의 손에 의해 다시 깨어나고 있다는 말씀이신 거죠." 한도영이 정리하듯 말했다. 정지훈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떨궜다. 그의 침묵이 곧 긍정의 대답이었다. 지은은 잠시 눈을 감았다. 협의회 내부의 정체불명의 '고문', 정거장 심층부에서 깨어난 오리온-X의 흔적, 그리고 10년 전 자신을 위협했던 이름. 모든 조각이 하나로 맞춰지고 있었다. "박사님, 은퇴는 잠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철수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정지훈은 씁쓸하게 웃으며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애초에 이런 상황에서 은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내가 만든 것이 벌인 일이니, 끝까지 책임지는 게 도리겠지." 그의 목소리에는 오랜 세월 짊어져 온 죄책감과, 그럼에도 물러설 수 없다는 결연함이 동시에 묻어났다. 지은은 그런 아버지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10년 전과는 또 다른 의미로 그를 다시 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도영이 진지하게 물었다. 한도영이 물었다. 정지훈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먼저 오리온-X의 현재 상태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단순히 신호만 보내는 수준인지, 아니면 이미 일부 시스템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회복하고 있는 건지. 그걸 알아야 대응 방법을 정할 수 있어." 정지훈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10년 전의 악몽이 되풀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짙게 배어 있었다. "제가 격리 구역 장치를 직접 점검해보겠습니다." 한도영이 나섰다. "단,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잘못 건드렸다가 오히려 시스템을 자극할 수도 있으니까." 그의 말에는 10년 전 현장에서 직접 겪었던 위기의 기억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때의 실수를 두 번 반복할 수는 없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제가 이서준과 함께 기술적인 부분을 지원하겠습니다." 철수가 덧붙였다. "그리고 지은 씨는…" 정지훈이 딸을 바라보았다. "협의회 내부의 그 '고문'이라는 인물에 대해 계속 알아봐 다오. 만약 정말 최윤아라면, 그녀가 화성 정치판 깊숙이 뿌리내리기 전에 정체를 확인해야 한다." "알겠어요, 아버지." 지은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 지은은 정지훈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10년 전 딸을 찾아 헤매던 노학자는, 이제 자신이 만든 것의 결과를 책임지기 위해 다시 한번 무거운 짐을 짊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동시에 존경스러웠다. 복도를 걷던 지은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정지훈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응?" "괜찮으세요? 아까부터 안색이 안 좋아 보이셔서." 정지훈은 잠시 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옅게 웃었다. "괜찮다. 다만… 10년 전에도 이런 얼굴을 했었지, 너를 찾기 전까지는." "그때랑 지금은 달라요. 이번엔 저도 옆에 있잖아요." 지은의 말에 정지훈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그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그때와 가장 큰 차이겠구나."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나란히 걸었다. 정거장 복도의 조명이 은은하게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아버지,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뭐든." "만약 최윤아 씨가 정말 나쁜 의도로 이 모든 걸 벌이는 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정말 자기 나름의 신념 때문이라면, 우리는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정지훈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신념이 있다고 해서 그 방법까지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를 완전한 악인으로만 보는 것도 옳지 않을 거다. 나는 그녀와 오랫동안 함께 일했다. 적어도 처음에는, 나만큼이나 이 정거장 사람들의 안전을 걱정하던 사람이었어."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걸까요." "글쎄다. 아마 그것도, 이제 우리가 직접 확인해야 할 부분이겠지." 두 사람이 연구실 앞 복도를 벗어날 즈음, 저 멀리서 이서준이 급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단말기 화면이 불안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부사령관님! 아, 여기 계셨네요." 이서준이 숨을 몰아쉬며 지은과 정지훈 쪽으로 다가왔다. "철수 부사령관님은 안에 계신가요? 격리 구역에서 방금 새로운 신호가 감지됐습니다. 이번엔 간격이 아니라… 신호에 짧은 데이터 패턴이 실려 있어요." 정지훈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데이터 패턴이라고?" "네. 저희 쪽 분석팀이 살펴보고 있는데, 단순한 오류 신호가 아니라 뭔가 의미 있는 정보가 담긴 것 같다고 합니다." 지은과 정지훈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 모두 같은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존재를 알리는 신호에서, 이제는 무언가를 전달하려는 신호로 바뀌었다는 것. 그것은 오리온-X가 단순히 깨어나는 것을 넘어, 누군가와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정지훈이 걸음을 돌렸다. 지은과 이서준도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연구실 문이 다시 열리고, 철수와 한도영이 놀란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밤은 이제 막 깊어지기 시작했지만, 아리랑 정거장의 긴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정거장 창밖으로 화성의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낯선 별빛 아래, 10년 전 봉인했던 이야기가 다시 한번 그들의 삶을 뒤흔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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