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연락관 지은
2026. 7. 18. · 👁 4
지은은 새벽부터 눈을 뜨고 있었다. 어젯밤 정지훈의 연구실에서 나눈 대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오리온-X, 47분 13초 간격의 신호, 그리고 최윤아라는 이름. 10년 전 자신이 아버지를 찾아 헤매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정거장 하부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어스름한 새벽빛 속에서 정거장의 조명들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10년 전, 이 정거장은 그녀에게 오직 아버지를 찾기 위한 목적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수천 명의 삶이 걸린, 그녀 자신도 그 일부가 된 터전이었다. 그 무게가 새삼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오늘 처리해야 할 또 다른 일이 있었다. 지구-화성 협력 기구 연락관으로서, 오전 열 시에 예정된 화성 자치 협의회와의 정례 회담이었다. 회담장은 정거장 3층, 넓은 원형 테이블이 놓인 회의실이었다. 지구 본부를 대표하는 화상 회선이 정면 스크린에 띄워져 있었고, 테이블 한쪽에는 화성 자치 협의회 대표단이 앉아 있었다. 그 중심에는 협의회 의장 강태오가 자리하고 있었다. "박지은 연락관님, 오늘도 지구 본부의 입장을 대변하러 오셨겠지요." 강태오가 특유의 냉소적인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지은은 침착하게 자료를 펼치며 대답했다. "저는 어느 한쪽의 입장을 대변하러 온 게 아닙니다. 양측이 합의점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게 제 역할입니다." "말은 참 좋군요. 하지만 실제로는 지구 본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 아닙니까?" 회의실 안에 미묘한 긴장이 흘렀다. 지은은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준비해온 안건을 하나씩 짚어나갔다. 자원 배분 문제, 신규 이주민 수용 한도, 그리고 최근 논의되고 있는 화성 자치권 확대 방안까지. "자치권 확대 건에 대해서는, 지구 본부도 단계적 논의에는 열려 있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정거장의 핵심 기반 시설에 대한 관리 권한은…" "핵심 기반 시설이라 함은, 결국 오리온-X 같은 시스템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강태오의 말에 지은의 손끝이 순간 멈췄다. 회의실 안 다른 대표들도 잠시 술렁였다. 지은은 애써 담담한 얼굴을 유지하며 되물었다. "그건 갑자기 왜 나온 얘기입니까." 강태오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회의실 안의 다른 대표들도 서로 눈치를 살피며 침묵을 지켰다. "저희 쪽에도 정거장 내부 소식이 아예 안 들어오는 건 아니거든요. 어젯밤 격리 구역에서 뭔가 소란이 있었다고 하던데." 지은은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불과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정보가 이미 자치 협의회 쪽에 흘러 들어갔다는 사실은, 정거장 내부 어딘가에 협의회와 연결된 정보원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어제 회의에서 언급되었던 우려, 독립파 내부와 이번 사건이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단순한 추측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답변드릴 위치가 아닙니다. 오늘 회담 안건에 없는 사항입니다." "안건에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문제가 되는 건 아니죠, 연락관님." 강태오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희 협의회가 지구 본부에 요구하는 건 간단합니다. 정거장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화성 주민들도 알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특히 그것이 오리온-X처럼, 10년 전 정거장 전체를 위협했던 시스템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요." 회의실 안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지은은 짧게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의장님 말씀의 취지는 이해합니다. 다만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항을 섣불리 공개했다가, 불필요한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사실관계가 명확해지는 대로, 필요한 정보는 반드시 공유하겠습니다." "그 약속, 믿어도 되겠습니까?" "제 이름을 걸고 말씀드립니다." 강태오는 잠시 지은을 바라보다가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신뢰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물러서겠다는 뜻이었다. 회담이 끝난 후, 지은은 홀로 회의실에 남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거장 하부, 격리 구역이 있는 방향이었다. 협의회 쪽에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정거장 내부 인력 중 누군가가 협의회와 접촉하고 있다는 뜻이었고, 그것은 곧 이번 사건이 단순한 시스템 오류를 넘어 정치적 사안으로 번질 수 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녀는 단말기를 꺼내 철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협의회 쪽에서 어젯밤 격리 구역 소란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내부에 정보가 새고 있는 것 같아요.] 답장은 금방 왔다. [한도영 실장한테 바로 전달할게. 오늘 저녁에 다시 모이자.] 지은은 단말기를 내려놓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10년 전에는 아버지를 찾는 일에만 몰두했던 자신이, 지금은 정거장 전체의 안위와 지구-화성 간의 정치적 균형까지 신경 써야 하는 위치에 서 있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지켜야 할 것이 그만큼 늘어나는 일이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오후에는 협의회 부의장인 윤서희가 따로 그녀를 찾아왔다. 강태오와 달리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가진 인물이었다. "아까는 분위기가 많이 날카로웠죠. 의장님이 원래 좀 직설적이셔서."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사실 저는 오늘 좀 다른 얘기를 하러 왔어요." 윤서희가 목소리를 낮췄다. "최근 협의회 내부에, 정거장 시스템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어요. 겉으로는 온건파처럼 행동하는데, 뒤에서는 뭔가 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 같아서." 지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확실하지 않아서 지금은 말씀드리기 조심스러워요. 다만…" 윤서희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 사람, 정거장 초기 시절부터 화성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소문이 있어요. 10년도 더 된." 지은의 심장이 순간 빠르게 뛰었다. 10년 전부터 화성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정거장 시스템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자세히 알고 있다는 것.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혹시… 여성분인가요?" 윤서희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지은은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어젯밤 정지훈이 꺼냈던 그 이름이 다시 한번 머릿속을 스쳤다. "윤서희 부의장님, 혹시 그분 얼굴을 직접 본 적 있으세요?" "아뇨, 저도 소문으로만 들었어요. 협의회 안에서도 그분과 직접 대면한 적 있는 사람이 몇 없다고 하더라고요. 항상 다른 사람을 통해 의견을 전달한다고." "이름은요." "저희끼리는 그냥 '고문'이라고만 불러요. 공식 직함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부르는 거예요. 협의회 초창기부터 뒤에서 자문 역할을 해왔다는 얘기만 있고, 정확한 신원은 저도 몰라요." 지은은 짧게 숨을 골랐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조언자가 화성 자치 협의회 초창기부터 관여해왔다는 것, 그리고 정거장 시스템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알고 있다는 것. 모든 정황이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얘기, 다른 사람한테도 하셨어요?" "아뇨. 사실 이런 얘기를 함부로 꺼냈다가 괜한 오해를 살까 봐 조심스러웠어요. 그런데 연락관님이라면 믿고 말씀드려도 될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이 정보, 조심스럽게 다룰게요." 윤서희가 돌아간 후, 지은은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창밖으로는 협의회 건물을 오가는 사람들이 평소와 다름없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평범한 풍경 속 어딘가에, 10년 전 종적을 감췄던 인물이 얼굴을 숨긴 채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다시 단말기를 들어 이번엔 한도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화성 자치 협의회 내부에 정체불명의 '고문'이라는 인물이 있대요. 초창기부터 관여했고, 얼굴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최윤아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요.] 한도영의 답장은 평소보다 빨랐다. [확인해보겠습니다. 오늘 저녁 회의에서 자세히 얘기하죠.] 지은은 단말기를 내려놓고 잠시 눈을 감았다. 10년 전, 아버지를 찾아 헤매던 그 시절에는 최윤아라는 이름이 그저 자신을 위협하는 두려운 존재로만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 연락관이라는 위치에서 이 사건을 마주하고 보니, 그 이름의 무게가 다르게 다가왔다.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화성의 정치 지형 깊숙한 곳에 뿌리내려온 존재라는 사실이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그날 저녁, 지은은 정지훈의 연구실로 향하는 길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협의회 내부에 최윤아로 추정되는 인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최대한 빨리 전해야 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번 사건은 정거장 내부의 기술적 문제를 넘어, 화성 전체의 정치적 지형을 뒤흔들 수 있는 사안이 될 터였다. 연구실 앞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이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낮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철수와 한도영이 먼저 도착해 무언가 심각한 얘기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지은은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오늘 알아낸 사실을 어떻게 전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10년 전 끝나지 않았던 이야기가, 이제 그녀의 손에서 다시 한번 중요한 국면을 맞이하려 하고 있었다. 정거장 창밖으로 붉은 화성의 저녁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10년 전 시작되었던 이야기가, 이제 지구와 화성 사이의 첨예한 갈등 속으로 다시 한번 얽혀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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