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재소집
2026. 7. 18. · 👁 3
연구실 안, 이서준이 가져온 단말기 화면에는 조금 전 격리 구역에서 수신된 데이터 패턴이 그래프 형태로 떠 있었다. 단순한 오류 신호와 달리, 파형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오르내리고 있었다. "분석팀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던가." 철수가 화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암호화된 데이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다만 저희 쪽 암호 체계로는 해독이 안 된다고…" 이서준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정지훈이 태블릿을 내려놓고 화면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파형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문득 무언가를 알아챈 듯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우리가 쓰던 방식이 아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리온-X의 원래 통신 프로토콜은 이것과 다르다. 이 파형은…" 정지훈이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말을 이었다. "이건 당시 최윤아가 독자적으로 개발하던 암호화 방식과 유사하다. 나도 완전히 알지는 못해. 그녀가 자신의 개인 연구 노트에만 기록해두고, 나한테는 공유하지 않았던 부분이었으니까." "그럼 이걸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까?" 한도영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정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없지는 않다. 당시 개발팀에 있던 사람 중에, 최윤아의 연구 방식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 하나 더 있다." "누굽니까?" "조민재. 지금은 화성이 아니라 지구 쪽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을 거다. 사건 이후 정거장을 떠났으니까." "조민재라면… 저도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당시 개발팀 막내였다고." 철수가 그 이름을 듣고 잠시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이서준은 처음 듣는 이름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지훈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였지만 실력은 확실했다. 최윤아가 유독 신뢰하던 후배이기도 했고." 정지훈이 씁쓸하게 덧붙였다. "사건 이후 그는 정거장에 남는 걸 거부하고 지구로 돌아갔다. 아마 지금도 이 정거장, 그리고 오리온-X와 관련된 일이라면 손사래를 칠 거야."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한도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공식 채널로 협조 요청을 보내겠습니다. 정거장 안전이 걸린 문제라면, 지구 본부도 인력 파견에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정지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주게. 다만 정중하게 요청해야 할 거야. 그는… 이 정거장에 별로 좋은 기억이 없는 사람이니까." 지은은 그 대화를 들으며 새삼 이번 사건의 규모를 실감했다. 단순히 정거장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지구에 있는 인력까지 다시 불러들여야 할 만큼 크고 복잡한 사안이었다. "저도 협력 기구 쪽 채널로 조민재 씨에 대한 자료를 좀 찾아볼게요. 현재 소속이나 연락 가능한 경로 같은 거요." "부탁한다." 한도영이 짧게 답했다. 그날 밤, 한도영은 개인 집무실에 홀로 남아 정거장 인사 기록 보관소를 뒤지고 있었다. 조민재의 최근 소속과 연락처를 확인하는 동시에, 그는 10년 전 자신이 은폐했던 기록 하나를 다시 열어보았다. 화면에는 당시 그가 작성했던 보고서 초안이 떠 있었다. 최종적으로 제출된 공식 보고서와는 다른, 삭제된 버전이었다. 그 안에는 최윤아가 사건 당시 남긴 마지막 메시지의 전문이 담겨 있었다. [나는 이 정거장을 파괴하려던 게 아니었다. 다만 언젠가, 사람이 아닌 것이 더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랐을 뿐이다.] 한도영은 그 문장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10년 전, 그는 이 메시지를 공식 보고서에서 삭제했다. 최윤아를 단순한 범죄자로 규정하는 것이, 정거장의 안정을 위해서는 더 나은 선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그 문장을 마주하니, 자신의 그 판단이 옳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는 화면을 끄고 눈을 감았다. 이 사실을 언제, 누구에게 밝혀야 할지 아직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조만간 그 선택의 순간이 반드시 찾아오리라는 것. 다음 날 아침, 지은은 지구 연구소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조민재의 소속을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현재 지구 궤도 연구소에서 데이터 암호화 분야 전문가로 근무하고 있었다. 정거장을 떠난 지 10년, 그는 이제 화성과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조용히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온 듯했다. "협조 요청은 보냈어요. 답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지은이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에게 보고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확신과 불안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거절할 가능성은 없나?" 철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모르겠어요. 다만 정거장 안전이 걸린 문제라고 명시했으니, 완전히 외면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한도영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젯밤 다시 마주했던 최윤아의 마지막 메시지가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아직 그 사실을 동료들에게 털어놓지 못한 채였다. "일단 조민재 씨의 답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계속 진행하죠." 지은이 분위기를 정리하며 말했다. "격리 구역 감시를 강화하고, 협의회 내부의 '고문'이라는 인물에 대한 조사도 계속하고요." "그렇게 하지." 철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서준, 자네는 나랑 같이 격리 구역 쪽 감시 체계를 다시 점검하자. 데이터 패턴이 언제 또 나올지 모르니 실시간으로 잡아낼 수 있어야 해." "알겠습니다." 이서준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는 이번 사건에 자신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동시에, 10년 전 사건의 무게가 여전히 자신이 다 헤아리기 힘들 만큼 깊다는 것도 실감하고 있었다. 회의실을 나서기 전, 지은이 문득 한도영을 돌아보았다. "실장님, 어젯밤부터 안색이 계속 안 좋으신데. 괜찮으세요?" 한도영은 순간 움찔했지만, 곧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요즘 잠을 좀 설쳐서요." 한도영이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리하지 마세요. 이번 일, 실장님 혼자 짊어지실 필요 없어요." 지은의 말에 한도영은 옅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아직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무거운 비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삭제했던 최윤아의 마지막 메시지를 다시 떠올렸다. 이 사실을 공개하는 순간, 동료들은 그를 신뢰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10년 전 자신의 선택이 정말 옳았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회의실을 나선 지은은 곧장 협력 기구 사무실로 향했다. 조민재의 답신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협의회 내부 '고문'에 대한 추가 조사를 이어가기로 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그녀의 보좌관인 젊은 직원이 다급한 얼굴로 다가왔다. "연락관님, 방금 협의회 쪽에서 이상한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연락이요?" "강태오 의장이 갑자기 긴급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오늘 오후로요. 이유는 밝히지 않았고요." 지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제 회담에서 격리 구역 소식을 이미 알고 있던 강태오였다. 갑작스러운 긴급 면담 요청이 결코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일정 잡아주세요. 저도 그쪽 얘기가 궁금하니까." "알겠습니다." 보좌관이 자리를 뜨자, 지은은 창가에 서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10년 전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하나둘 모이고 있는 것처럼, 반대편에서도 무언가가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협의회의 '고문', 갑작스러운 면담 요청, 그리고 정거장 심층부에서 깨어난 오리온-X의 신호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서서히 맞물려 가고 있었다. 오후, 강태오와의 면담 자리에서 지은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연락관님,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정거장이 지금 오리온-X와 관련된 사태를 겪고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지은은 순간 대답을 망설였다.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사안이었다. 그러나 강태오의 표정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단호했고, 그 눈빛은 어떤 거짓말도 통하지 않을 것처럼 날카로웠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으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강태오가 목소리를 낮췄다. "협의회 내부에도, 이 사안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는 것만 알아두십시오. 만약 사실이라면, 저희도 더 이상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지은은 그 말이 협박인지, 아니면 진심 어린 우려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사건은 더 이상 정거장 내부만의 문제로 남아있지 않을 거라는 것. 면담을 마치고 나오는 길, 지은의 단말기가 짧게 진동했다. 한도영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조민재 씨로부터 답신이 왔습니다. 협조하겠다고 합니다. 다음 수송선으로 정거장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지은은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0년 전 흩어졌던 사람들이 이제 다시 하나둘 모이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협의회 내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 또한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반가움과 불안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정거장 창밖으로 화성의 노을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재소집이 시작된 이 밤, 앞으로 다가올 진실은 그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얽혀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진실의 무게를, 이제 곧 모두가 함께 짊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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