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첫 번째 피
2026. 7. 15. · 👁 9
하구현의 벽력문은, 소문대로 떵떵거리고 있었다.
높은 담장과 붉은 대문. 문 앞을 지키는 무사만 여남은 명. 십 년 전 천마신교 토벌의 공으로 받은 훈장을 앞세워, 벽력문은 이 일대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면서도, 스스로를 정의로운 협객이라 불렀다.
무진은 사흘을 지켜보았다. 벽력문의 경계, 무사들의 교대, 문주가 머무는 내당의 위치까지. 십 년을 짐승을 사냥하며 산 그에게, 이 정도 잠입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밤이 깊었다.
담장 위로, 그림자 하나가 소리도 없이 내려섰다. 삿갓을 벗은 무진의 얼굴에는, 새하얀 무면만이 달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났다.
"웬 놈이냐!"
순찰을 돌던 무사가 그를 발견하고 검을 뽑았다. 하지만 소리를 지른 것이, 그가 한 마지막 일이었다.
무진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다음 순간, 무사는 자신이 어떻게 쓰러졌는지도 모른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목숨은 붙어 있었다. 아직은.
경보가 울렸다. 벽력문의 무사들이 횃불을 들고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침입자다! 잡아라!"
수십 자루의 검이 무진을 에워쌌다. 하지만 무진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이런 순간을 위해, 십 년을 짐승처럼 버텼다.
무진의 검이, 처음으로 검집을 벗어났다.
그날 밤, 벽력문의 앞마당은 지옥이 되었다.
무진은 폭풍 같았다. 검을 다스리는 정교함은 없었다. 오직 쌓이고 쌓여 터질 듯한 내공을, 검 끝에 실어 휘두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무식한 힘 앞에서, 벽력문의 무공 따위는 종잇장과 같았다.
검이 부러지고, 방패가 갈라지고, 사내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무진은 멈추지 않았다. 이 자들은, 십 년 전 그날 밤 사부의 얼굴들을 짓밟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싸움이 길어질수록, 무진의 단전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통제되지 않는 내공이, 또다시 안에서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반쪽의 심법. 힘을 오래 쏟을수록, 주화입마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관자놀이로 핏줄이 불거지고, 시야가 붉게 흔들렸다.
'…아직이다. 아직, 쓰러질 수 없어.'
무진은 이를 악물고 폭주하는 기운을 억눌렀다. 그 악착같은 집념이, 다시 한번 그를 지탱했다.
마침내 무진은, 내당 깊숙한 곳에서 문주의 앞에 섰다. 벽력문주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 부들부들 떨며 뒷걸음질 쳤다. 방금 전까지 이 일대의 패자로 군림하던 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 살려주게! 대체 왜 이러는 건가! 우리가 자네한테 뭘 어쨌다고!"
무진은 무면 아래로 나직이 물었다.
"십 년 전. 천마신교."
문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건… 우린 그저 명을 따랐을 뿐이네! 무림맹이, 위에서 시킨 일이야! 우리 같은 말단이 뭘 알았겠나! 시키니까, 그저 시키니까 한 거라고!"
"명을 따랐다."
"그, 그래! 우린 그저 시키는 대로…!"
"그래서 여자도, 아이도 베었나."
문주가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무진의 눈이 얼음처럼 식었다. 그날 밤 불타던 총단. 검에 꿰뚫린 사부. 그리고 이름조차 부를 수 없게 된 사형들과 주방 아저씨. 그 모든 얼굴이, 무면 아래로 스쳐 지나갔다.
"당신들이 벤 아이 중 하나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려주지."
"…뭐?"
"그게, 지금 당신 앞에 서 있다."
문주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가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늦었다.
무진의 검이 달빛을 갈랐다.
첫 번째 피였다. 십 년을 기다린, 복수의 첫 번째 피.
짐승이 아닌 사람을, 처음으로 벤 밤이었다. 그런데도 무진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다만 가슴 깊은 곳이, 서늘하게 비어 갈 뿐이었다. 복수는, 생각만큼 뜨겁지 않았다.
십 년을 오직 이 순간만을 그리며 버텼다. 첫 번째 원수를 베고 나면, 조금은 후련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손에 남은 것은 공허뿐이었다. 죽은 자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잿더미가 된 총단도 되살아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진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든, 끝까지 걸어갈 작정이었다. 그것만이, 잿더미 속에서 홀로 살아남은 자의 몫이었으니까.
무진은 피 묻은 검을 천천히 거두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직, 시작일 뿐이다."
문주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무림맹이 시킨 일. 위에서 내려온 명. 벽력문 같은 말단은, 그저 남이 휘두른 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그렇다면 진짜 원흉은, 훨씬 더 위에 있었다.
무진은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벽력문의 몰락과― 새하얀 무면의 그림자만이 남았다.
며칠 뒤, 강호가 발칵 뒤집혔다.
정파의 훈장까지 받은 벽력문이, 하룻밤 사이에 얼굴 없는 검객 하나에게 몰살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사람들은 그 검객을 이렇게 불렀다. 무면검객(無面劍客).
그리고 그 소식은, 마침내 무림맹의 귀에까지 닿았다.
거대한 성채 같은 무림맹 본단. 그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누군가가, 벽력문의 이름을 듣고는― 미세하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면검객이라."
넓은 대전, 창밖으로 무림 정파의 깃발이 위풍당당하게 펄럭였다. 정천검(正天劍) 남궁호. 무림맹주이자, 온 강호가 우러르는 정의의 화신. 그는 손에 든 서찰을 천천히 구겨 쥐었다.
곁에 시립한 늙은 장로가 조심스레 물었다.
"맹주님, 한낱 정체 모를 살인마일 뿐입니다. 토벌대를 보내 처리하면 그만인 일을, 어찌 그리 심려하십니까."
남궁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을 뿐이었다. 벽력문. 하필이면 벽력문이었다. 십 년 전 그 밤에 관한 것이라면, 아주 작은 불씨 하나도 남겨두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 그날의 진실을 아는 자들 사이의, 오랜 불문율이었다.
"…토벌대를 준비하라." 남궁호가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 그자의 얼굴을, 반드시 확인해라. 산 채로든, 죽여서든."
장로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홀로 남은 남궁호는, 오래도록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십 년 전 잿더미 속에 묻어버린 무언가가, 다시 땅을 뚫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자도 모르는 자도― 이제 아무도 그 흐름을 멈출 수 없었다.
💬 댓글 0
로그인하고 감상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