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J.K.의 비밀
2026. 7. 15. · 👁 5
궤도 진입 후 첫 '밤'이 찾아왔다. 물론 우주선에서 밤과 낮은 인공적으로 정해진 개념일 뿐이었다. 90분마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궤도 위에서, 해는 하루에도 열여섯 번 뜨고 졌다. 선내 조명이 어두워지자, 승객들은 각자의 수면 캡슐로 흩어졌다. 철수는 잠이 오지 않았다. 공용 라운지로 나가자, 예상대로 지은이 그곳에 있었다. 창밖 지구를 등지고 앉아, 그 낡은 수첩을 무릎 위에 펼친 채였다. "또 못 주무세요?" 철수가 무중력 속에서 조심스레 손잡이를 잡으며 다가갔다. "이 안에서 잠이 잘 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신기하죠." 지은이 씁쓸하게 웃었다. 철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계속 궁금했는데... 그 수첩, 물어봐도 될까요?" 지은은 대답 대신 수첩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오랜 침묵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 아버지 거예요. 정지훈." 그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철수는 기억을 더듬었다. 뉴스에서, 혹은 다큐멘터리에서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2029년... 화성 유인선 시험비행?" 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시네요." "뉴스에서 봤어요. 발사 사흘 만에 통신이 끊겼다고... 결국 실종 처리됐다고요." "실종이 아니라 사망 추정이었어요, 공식적으로는." 지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저는 그때 스물네 살이었어요. 갓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였죠. 장례식도 못 치렀어요. 시신도, 잔해도 찾지 못했으니까." 철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지은은 수첩을 넘겨 한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손으로 눌러쓴 궤도 계산식과, 그 옆에 작게 적힌 메모들이 빼곡했다. "아버지가 발사 전에 저한테 남긴 개인 노트예요. 원래는 유품으로 받은 거고요. 그런데—" 그녀가 잠시 말을 끊었다. "최근에, 아르테미시아 기지 통신 로그에서 이상한 신호가 잡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비공식 경로로요." "이상한 신호요?" "11년 전 아버지가 화성 임무 때 쓰던 개인 암호 패턴이랑 일치하는 신호였어요. 아주 약하고, 간헐적이었지만." 지은이 철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말이 안 되죠. 화성 근처에서 실종된 사람의 신호가, 왜 달 기지 근처에서 잡히겠어요." 철수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래서... 이 여행을 신청하신 거예요?" "네. 아르테미시아에 가면 원본 로그에 접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은의 시선이 조종석 방향으로 향했다. "아무도 제 얘길 안 믿어요. 심지어 우주국 사람들도요." "기장님은요? 브리핑 때 지은 씨 이름 듣고 반응이 이상했잖아요." 지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저도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려요. 한도영이라는 이름, 아버지 수첩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데... 확실하지가 않아요." 그녀가 수첩을 넘기며 페이지를 뒤지는 동안, 철수는 창밖 지구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도시의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 아래 수백만 명의 사람들 중 누구도, 지금 이 순간 우주선 안에서 11년 전의 비밀이 다시 열리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할 것이었다.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철수가 말했다. 지은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요? 이건 제 개인적인 일이에요. 철수 씨가 휘말릴 필요는—" "이미 휘말린 것 같은데요." 철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저는 지구에서 뭔가 특별한 이유 없이 여기까지 왔어요. 근데 지은 씨한텐 이유가 있잖아요. 그 이유를 도와주는 게, 제가 여기 온 진짜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지은은 한참 동안 철수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옅게 웃었다. "고마워요." 그 순간, 라운지 입구의 조명 센서가 반응하며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그림자 하나가 복도 저편으로 조용히 사라지는 게 보였다. "방금 그거…" 철수가 낮게 속삭였다. 지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이미 수첩을 재빨리 가방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누군가 듣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라운지의 정적을 무겁게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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