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이서준
2026. 7. 16. · 👁 2
아버지의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회복기에 접어든 어느 날, 소은은 도현과 함께 그룹 계열사에서 주최하는 소규모 만찬에 초대받았다. 크지 않은 규모의 자리였지만, 참석자 대부분이 그룹 내 주요 인사들이었다. "오늘은 사업 관련 얘기가 많이 나올 겁니다. 지루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도현이 미리 귀띔했다. 소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옆에 자리했다. 만찬장은 은은한 조명 아래 우아한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도현아, 오랜만이다." 낯선 목소리에 소은이 고개를 돌리자, 훤칠한 키에 세련된 슈트를 입은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도현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지만, 어딘가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서준 형." 도현의 목소리에서 미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남자는 소은을 흥미롭다는 듯 살폈다. "이분이 요즘 화제의 그분이신가 보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이서준입니다. 도현이 사촌형이에요." "한소은입니다." 소은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서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도현을 바라보았다. "도현이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여자친구를 소개하는 거,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신기하네." "별로 특별할 것 없어요. 그냥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려진 거죠." 도현이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서준의 눈빛에는 뭔가 다른 의도가 담겨 있는 듯했다. "그나저나, 다음 이사회에서 신사업 안건 발표한다며? 준비는 잘 되고 있어?" "차질 없이 진행 중입니다." "할아버지가 요즘 너한테 힘을 많이 실어주시는 것 같더라. 나야 뭐, 응원할 수밖에."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긴장감을 소은도 느낄 수 있었다. 서준이 자리를 옮기며 마지막으로 소은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소은 씨, 다음에 시간 되시면 따로 차 한잔해요. 도현이랑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한 게 많아서." 서준이 멀어지자, 도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저 사람, 좀 조심하셔야 합니다." "어떤 분인데요?" "할아버지 형님의 아들이에요. 저와 같은 항렬에서 후계 구도에 있는 사람이고, 최근에는 저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려고 이것저것 손을 쓰고 있어요." 도현의 목소리에서 진지함이 묻어났다. "저 사람이 소은 씨한테 접근한다면, 절대 계약 관련 얘기는 하지 마세요. 어떤 식으로든 이용하려고 들 겁니다." 소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자신이 도현의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만찬이 끝나갈 무렵, 소은이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서준과 마주쳤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소은 씨,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서준이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소은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며 대답했다. "네, 무슨 일이시죠?" "그냥, 궁금해서요. 도현이가 좀 까다로운 성격인데, 소은 씨는 어떻게 그 벽을 넘으셨나 해서." "그냥 자연스럽게 만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흠, 그래요? 근데 신기하네요. 도현이가 갑자기 여자친구를 공개한 시기가, 할아버지가 결혼 압박을 시작하신 시기랑 딱 맞물리던데." 서준의 말에 소은의 심장이 철렁했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그 짧은 순간의 동요를 서준이 놓치지 않은 듯했다. "우연이겠죠, 뭐." 서준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건넸다. "혹시 나중에라도 도현이 때문에 힘든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저는 소은 씨 편이니까." 소은은 명함을 받으며 애매하게 웃었다. 서준의 미소 뒤에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지, 그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결코 순수한 호의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만찬장으로 돌아온 소은은 도현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조용히 전했다. 도현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명함은 절대 연락하지 마세요. 저 사람, 겉으로는 친절해 보여도 뒤로는 정보를 캐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눈치챘어요. 결혼 압박 시기랑 우리 계약 시기가 겹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도현의 얼굴이 굳었다. "어디까지 파악했는지 모르겠지만, 조심해야겠습니다. 저 사람이 계약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이용하려 들 거예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소은은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는 그저 계약이라는 틀 안에서 무난하게 흘러가던 관계가, 이제는 더 큰 위협 앞에 놓이게 됐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걱정 마세요. 제가 어떻게든 막겠습니다." 도현의 단호한 말에 소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불안했다. 서준의 미소 뒤에 숨겨진 날카로움이, 앞으로 두 사람의 계약에 어떤 균열을 낼지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한 소은은 서준에게 받은 명함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심플한 디자인의 명함 위에 적힌 이름 석 자가 유독 신경 쓰였다. 도현이 그렇게까지 경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예사롭지 않은 인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도현이었다. "집에 잘 들어가셨습니까?" "네, 방금 도착했어요." "아까 일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근데 그 사람, 정말 위험한 사람이에요? 왠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 않던데." 도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겉으로는 항상 친절하고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그게 더 위험한 이유예요. 사람들이 쉽게 경계를 풀거든요. 저도 예전에 그 형 때문에 꽤 큰 곤란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었는데요?" "나중에 말씀드리죠. 지금은 그냥, 서준 형과는 최대한 거리를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소은은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은 찜찜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 소은은 명함을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다. 도현의 말대로 연락할 생각은 없었지만, 서준이 언젠가 다시 접근해올 거라는 불안한 예감이 자꾸만 마음 한구석을 스쳤다. 창밖으로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소은은 침대에 누워 오늘 있었던 일들을 곱씹었다. 화려한 만찬장, 서준의 의미심장한 미소, 그리고 그런 위협 앞에서도 자신을 지키려 애쓰던 도현의 모습까지. 계약이라는 관계 안에서 시작된 감정이, 이제는 더 이상 가벼운 마음으로 흘려보낼 수 없는 무게로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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