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재계약은 없습니다
2026. 7. 15. · 👁 4
도현은 카페 안으로 들어서며 어제와는 다른 재킷을 입고 있었다. 짙은 회색 슈트에 서류 가방을 든 그의 모습은 어제보다 훨씬 더 사무적이고 딱딱해 보였다. 소은은 마른침을 삼키며 카운터 앞에 섰다. "자리에 좀 앉을까요." 도현이 창가 테이블을 가리켰다. 소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섰다. 두 사람이 마주 앉자, 도현은 서류 가방에서 파일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죠. 이 건물, 재건축 예정입니다. 임대차 계약은 이번 달까지고, 연장은 어렵습니다." 소은의 눈이 커졌다. "네? 그게 무슨…… 저희는 재계약 문의를 이미 관리사무소에 넣었는데요. 예전 건물주님이랑은 구두로 연장 얘기도 다 됐었고요." "구두 약속은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계약서상으로는 이번 달 말일이 만기고, 저는 연장할 계획이 없어요." 도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했다. 소은은 손끝이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이 카페는 그녀에게 단순한 가게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쓰러지시기 전, 함께 인테리어를 고민하며 하나하나 채워 넣은 공간이었다. "재건축이라니…… 갑자기 그러시면 저희 같은 소상공인들은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최소한 유예 기간이라도……." "유예 기간은 이미 관리사무소 공지로 두 달 드렸습니다. 그건 확인 안 하셨습니까?" 소은은 말문이 막혔다. 확인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 갑자기 실행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애써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저희는 여기서만 3년을 장사했어요. 단골손님도 많고, 지금 옮기면 그동안 쌓은 게 다 무너져요. 사장님, 아니, 대표님.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도현은 잠시 소은을 바라보았다. 어제 커피를 쏟았던 그 미안한 얼굴과는 또 다른, 절박함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시선을 거두고 서류를 정리했다. "개인적인 사정은 압니다만, 이건 회사 차원의 결정이라 제가 임의로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대표님이 결정하신 거잖아요, 방금 그러셨잖아요." 날카로운 지적에 도현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소은은 물러서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 그렇게 쉽게 포기 못 해요. 여기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요." "이유가 뭔데요." 도현이 묻자 소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편찮으세요. 병원비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길 여유도 없고, 지금 이 자리는 단골손님들 덕분에 겨우 유지되고 있어요. 새로 자리 잡으려면 최소 반년은 적자를 감수해야 하는데, 저희 형편에 그럴 여력이 없어요." 말을 마친 소은은 스스로도 놀랐다. 처음 본 사람에게, 그것도 어제 커피를 쏟은 무례를 저지른 상대에게 이렇게까지 속사정을 털어놓을 줄은 몰랐다. 도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소은의 손끝에 머물렀다. 자잘하게 갈라진 손등, 오래 서서 일한 티가 나는 자세. "……알겠습니다. 고려는 해보죠." 뜻밖의 대답이었다. 소은은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약속은 아닙니다. 검토해보겠다는 겁니다."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를 챙겼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소은을 돌아보았다. "참, 어제 세탁비는 청구 안 하겠습니다. 대신." "대신?" "조만간 다시 연락드리죠."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도현은 카페를 나섰다. 소은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안도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저 사람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날 밤, 소은은 병원에 들러 아버지를 살피고 돌아오는 길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좁은 원룸 안, 책상 위에 쌓인 병원비 고지서들이 그녀를 반겼다. 한숨을 내쉬며 고지서를 정리하던 중, 휴대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여보세요?" "이도현입니다." 소은은 순간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 네. 대표님. 무슨 일로……" "내일 오후 두 시, 시간 되십니까? 드릴 제안이 있습니다." "제안이요?" "카페 계약 건과 관련해서요.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소은은 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네, 그럼 내일 뵐게요." 전화가 끊긴 후에도 소은은 한참 동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어떤 제안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것이 설렘인지 불안함인지, 소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오후, 약속 장소인 호텔 라운지에 도착한 소은은 창가에 앉아 있는 도현을 발견했다. 그는 서류 봉투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저와 계약 연애, 하실 생각 있으십니까?" 소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지금 뭐라고……." "조건은 하나입니다. 6개월간 공식적인 제 연인 행세를 해주시면, 카페 임대 문제는 물론 아버님 병원비까지 전액 지원하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소은은 말을 잃었다. 도현의 표정은 진지했고, 농담처럼 보이지 않았다. 라운지의 잔잔한 음악 소리만이 침묵을 메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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