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화. 거대한 장벽
2026. 7. 22. · 👁 2
집무실 안에 흐르는 서늘한 정적을 깬 것은 손 여사의 가시 돋친 실소였다. 손 여사는 아들의 분노 어린 눈빛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고급 모피 코트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원? 시우 너 지금 이 아이가 그냥 직원이라서 이렇게 흥분하는 거니?” 손 여사의 시선이 시우의 뒤에 우뚝 서 있는 서진에게로 향했다. 오만하고 오만한 눈빛 속에는 깊은 경멸이 담겨 있었다. “칠 년 전에 네 아버지가 부도나고 사채업자들에게 쫓길 때, 내가 건넨 돈 봉투 받고 깔끔하게 떠났던 아이다. 그런 아이를 다시 옆에 두고 수석 비서니 뭐니 끼고 고쳐 쓰겠다고?” ‘돈 봉투……?’ 그 순간, 시우의 몸이 굳어졌다. 시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상상도 못 한 충격과 혼란이 격랑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어머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돈 봉투라니요?” 서진의 얼굴은 핏기를 완전히 잃은 채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칠 년 전, 사채업자들의 협박에 시달리며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던 서진에게 손 여사가 찾아왔었다. 손 여사는 시우의 미래와 유학 길을 핑계로 거액의 수표 봉투를 내밀었었다. 당시 서진은 단 한 푼의 돈도 받지 않고 봉투를 거절했었다. 그리고 ‘돈 때문이 아니라, 시우의 인생을 망치기 싫어서 제 발로 떠나는 겁니다’라며 돌아섰었다. 하지만 손 여사는 지금 시우의 앞에서 서진을 ‘돈을 받고 아들을 버린 통속적인 여자’로 완벽하게 조작하여 몰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서진아…… 거짓말이지? 어머니 말이 사실이야?” 시우의 목소리가 짓눌린 듯 떨려왔다. 서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당장 ‘아니에요, 전 돈 한 푼 받지 않았어요’라고 해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 여사는 서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 눈빛은 은밀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여기서 더 까발리면 네 동생 인생까지 매장시켜 버리겠다’는, 칠 년 전과 똑같은 악랄한 위협이었다. 서진은 바짝 말라버린 입술을 문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시우가 자신 때문에 어머니와 돌아서고, 그룹 내에서 입지가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자신이 또다시 변명하고 해명해 봤자, 이 거대한 재벌가 부모라는 장벽 앞에서는 시우만 상처받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서진의 입에서 나온 나지막한 한마디에 시우의 눈빛이 무섭게 흔들렸다. “뭐……?” “이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전 칠 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거룩한 여자가 아닙니다.” 서진은 자폭하듯 거짓을 뱉어냈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 피가 터져 나오는 것 같았지만,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단호하게 시우의 눈을 직시했다. “제가 비서실에 남아있었던 건, 제 커리어와 입지를 위해서였습니다. 대표님과의 감정 놀음도…… 그저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착각하게 만들어 드렸다면 사과드립니다.” “한서진!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시우가 서진의 어깨를 잡고 거세게 흔들었다. 눈에 핏발이 선 채 오열하듯 소리쳤다. “거짓말하지 마! 며칠 전에 내 품에서 눈물 흘리면서 진실을 말했던 건 뭔데! 나한테 짐이 되기 싫어서 도망친 거라며! 그게 다 거짓말이었단 거야?” “네. 전부 대표님의 동정심을 자극하기 위한 거짓말이었습니다.” 서진은 시우의 손을 차갑게 털어냈다. “이사장님, 추한 모습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오늘부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비서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서진은 손 여사에게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넨 뒤, 대표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한서진! 거기 서! 못 나가, 한서진!” 시우가 서진을 쫓아가려 했지만, 손 여사의 수행원들이 시우의 앞을 막아서며 그를 제지했다. “이거 놓지 못해! 당장 안 비켜? 서진아! 한서진!” 뒤에서 들려오는 시우의 절규 같은 부르짖음을 뒤로한 채, 서진은 피눈물을 흘리며 비서실을 걸어 나왔다. 십 년 동안 제 몸처럼 아끼고 일궈왔던 비서실 책상 위에서 개인 물품 몇 개를 상자에 담는 서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다은이 놀라 달려와 서진을 잡았지만, 서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짐을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비가 오던 그날 밤. 서진은 텅 빈 자취방 한가운데 앉아 상자를 내팽개친 채 목놓아 울었다. 칠 년 전처럼 또다시 그를 위해 나쁜 여자가 되어 도망쳤다는 자괴감과, 그를 향한 애절한 그리움이 서진의 온몸을 짓눌렀다. 그 시각, 대표실. 시우는 어머니가 떠난 뒤, 텅 빈 집무실에 홀로 남아 바닥에 나뒹구는 서진의 사직서를 집어 들었다. 그의 눈에서는 차가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칠 년 전처럼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았다. 서진의 마지막 눈빛 속에서 읽어낸 비통함과, 어머니의 부자연스러운 태도에서 시우는 이미 판의 진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시우는 사직서를 찢어버리지 않고 곱게 접어 수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돈 봉투……?” 시우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그 실소 끝에는 서늘하고도 위험한 집착이 서려 있었다. “칠 년 전엔 내가 힘이 없어서 억울하게 빼앗겼지만…… 이번엔 절대 안 속아, 한서진.” 시우는 비서실로 전화를 걸어 차갑게 명령했다. “기획조정실 이태성 팀장, 그리고 감사팀장 지금 당장 내 방으로 올리세요. 그리고 한서진 수석 비서의 칠 년 전 계좌 내역과 저희 어머니 재단 쪽 자금 흐름, 전부 조사합니다.” 시우는 통유리창 너머의 빗줄기를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네가 아무리 나를 위해 악역을 자처해도, 이번엔 내가 그 악역의 가면을 찢어발겨서라도 너를 내 곁으로 가져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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