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벽 두 시, 이름 없는 목소리
2026. 7. 15. · 👁 6
스튜디오의 불빛은 항상 두 가지 색이었다. 온에어 사인이 켜지면 붉은색, 꺼지면 푸른빛이 도는 흰색. 이한은 그 사이를 오가는 시간을 좋아했다. 낮 동안 쌓인 말들을 다 걸러내고, 오직 목소리만 남는 시간. “밤 열두 시가 넘으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솔직해집니다.” 이한은 마이크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낮은 목소리로 오프닝을 시작했다. 방송명 ‘한밤’. 본명은 아무도 몰랐다. 프로듀서인 정 선배와 몇몇 스태프를 빼면, 이한이 낮에 어떤 얼굴로 어떤 일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도 여러분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게시판에, 문자로, 어떤 형태든 좋아요. 저는 그저 듣는 사람이니까요.” 큐시트를 넘기던 그의 손이 멈춘 건, 화면에 새로 뜬 사연 하나 때문이었다. 발신자 이름은 ‘봄이’.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디제이님, 저는 오늘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할 때 딱 한마디,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가 전부였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라디오를 켜면 누군가와 대화하는 기분이 들어요.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해주실 건가요?” 이한은 잠시 그 문장을 눈으로 다시 읽었다. 흔한 사연이었다. 외로움, 침묵, 라디오라는 매개. 하지만 문장의 리듬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데, 그 안에 뭔가 조심스럽게 눌러둔 온도가 있었다. “봄이님, 사연 잘 읽었습니다.” 이한은 마이크 볼륨을 살짝 올렸다. “하루 종일 한마디도 안 하신 날, 저는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요. 사실 저도 낮에는 말을 잘 안 하는 사람이거든요.” 그건 사실이었다. 카페에서 일하는 이한은 필요한 말 외에는 거의 하지 않았다. 주문받고, 확인하고, 감사 인사. 그게 전부였다. 밤이 되어 마이크 앞에 앉으면 그제야 말이 트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얼굴을 가리면 오히려 더 솔직해진다는 것이. “그런데 신기하죠. 아무 말도 안 한 날일수록, 마음속엔 할 말이 더 많이 쌓여 있다는 거요. 봄이님도 그런 밤이었나 봐요. 오늘 신청곡, 조용한 걸로 골라볼게요.” 이한은 플레이리스트에서 잔잔한 피아노 곡 하나를 골라 걸었다. 곡이 흐르는 동안 그는 헤드폰을 살짝 내리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스튜디오 유리창 너머로 텅 빈 도로가 보였다. 새벽 두 시의 도시는 낮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서연은 방 안 스탠드 불빛 아래 라디오 앱을 켜놓은 채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얼굴 없는 인물, 뒷모습만 있는 실루엣. 요즘 그녀가 그리는 그림에는 항상 얼굴이 없었다. 이유는 스스로도 잘 몰랐다. 이한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서연은 손을 멈췄다. “봄이님, 사연 잘 읽었습니다.” 자신의 닉네임이 불릴 때마다 서연은 조금 놀랐다. 매일 밤 사연을 보내면서도, 실제로 소개될 때는 늘 예상치 못한 순간처럼 느껴졌다. 목소리가 이어졌다. 낮에는 말을 잘 안 한다는 디제이의 고백. 서연은 피식 웃었다. “저도 그런데요.” 혼잣말이었다. 대답할 리 없는 라디오를 향해, 그녀는 자주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이상한 습관이었지만, 이 목소리 앞에서는 자연스러웠다. 서연은 요즘 낮 동안 자주 가는 카페가 있었다. 집 근처, 조용하고 사람이 많지 않은 곳. 그곳의 매니저는 말수가 적었다. 주문을 받을 때도, 커피를 건넬 때도 필요한 말만 정확히 했다. 처음엔 무뚝뚝하다고 생각했는데, 몇 번 마주치다 보니 그 절제된 태도가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오늘 낮에도 그 카페에 갔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그게 전부였다. 매니저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주문을 넣었다. 서연은 창가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카운터 쪽을 바라봤었다. 매니저는 손님이 없는 틈에 조용히 손목시계를 보고 있었다. 그 무심한 옆모습이 왠지 눈에 오래 남았다. 물론 서연은 몰랐다. 그 매니저가 밤이 되면 마이크 앞에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말을 쏟아낸다는 것을. 그리고 이한도 몰랐다. 낮 동안 카운터 건너편에서 조용히 커피를 받아가던 손님이, 밤마다 그의 방송에 사연을 보내는 ‘봄이’라는 것을. 두 사람 사이에는 그렇게, 알아채지 못한 채 이미 여러 번 스쳐 지나간 순간들이 쌓여 있었다. 방송이 끝나갈 무렵, 이한은 마지막 멘트를 준비했다. “오늘 밤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하루, 말을 많이 못 하더라도 괜찮아요. 그 말들, 여기 다 쌓아뒀다가 밤에 저한테 들려주세요. 저는 항상 여기 있을게요.” 온에어 사인이 붉은빛에서 흰빛으로 바뀌었다. 이한은 헤드폰을 벗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스튜디오는 다시 조용해졌다. 정 선배가 유리창 너머에서 손을 흔들며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오늘 사연 반응 괜찮던데. 봄이라는 애청자, 요즘 자주 보이더라.” “그런가요.” 이한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그 문장의 담백한 온도를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서연은 라디오를 끄고 태블릿 화면을 바라봤다. 얼굴 없는 인물의 실루엣이 그대로 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위에 작게 목도리 하나를 그려 넣었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오늘 밤 들은 목소리가 조금 춥게 느껴졌던 것 같아서. 창밖으로 봄바람이 지나갔다. 아직은 차가운 밤공기 속에, 두 사람의 세계는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서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물론, 둘 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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